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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병역명문가' 선정 '동상' 수상

신문속의 오늘

by 실암 2012. 6. 1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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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문이 '2012년 병역명문가' 선정에서 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 집안에서 3대가 모두 빠짐없이 현역으로 복무를 마치면 그 가문은 병무청이 찾는 '병역명문가 가문'이다.

  즉, 조부, 백부, 숙부, 본인, 형제, 사촌형제 등 조부의 직계비속 남자 모두가 현역으로 병역이행을 마쳤음을 말한다.

  병무청은 2004년부터 매년 병역명문가 찾기에 나서고 있는데, 올해는 4월 4일까지 신청을 받은 결과 485가문이 신청하였고, 심사 결과 301가문이 ‘병역명문가’로 최종 선정되었다. 한편 올해까지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가문은 총 1363가문이다.

  지난 6월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시상식이 열렸으며, 우리 가문은 301가문 중에서 20가문 안에 들어 동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해 선정된 가문중 병역이행자수와 복무개월수 등을 고려해 20가문을 선정하여 대통령표창과 국무총리표창, 국방부장관 표창, 병무청장 표창을 수여한다.

  우리 가문은 아버지, 형, 그리고 나와 동생, 아들 둘, 조카 둘 등 8명이 현역병으로 병역이행을 마쳤으며, 복무 기간은 총 235개월(19년 7개월)이다. 아버지와 동생, 조카(동생 아들) 등 3대에 걸쳐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해군 1명과 나머지 4명은 육군에서 복무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황식 국무총리, 이용걸 국방부차관, 김일생 병무청장과 수상자 가족 등이 참석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비롯하여 형과 동생 그리고 나, 아들 등 9명이 참석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병역명문가라는 타이틀은 우리 가문의 큰 영광이고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더욱 겸손하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바른 정신을 후대에도 널리 알리고 싶다.

 "병역명문家가 진정한 명문家다" 라는 말처럼 이제 병역은 의무 그 이상의 권리와 자랑과 긍지와 보람의 산실이었으면 한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소중한 목숨을 나라에 바친 영령들과 헌신한 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높이 받들어 더 크고 강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각오와 다짐을 새로이 하는 6월이 되었으면 한다.

 

 

  ^^ 3대 8명이 235개월간(19년 7개월) 군복무

  경북 상주시 이안면 이규민(80)씨 가문, 올해 병역명문가 선정 동상 수상.

  이규민 가문은 6.25 직후 해병대에서 복무한 1대 이규민씨를 포함 한 2대 아들 3형제, 3대 손자 4명 등, 3대에 걸쳐 모두 8명이 현역 사병으로 235개월간(19년 7개월)을 복무했다. <시상식이 끝난 뒤 가족 기념촬영>

 

 

 

  ^^ 김일생 병무청장으로 부터 동상 표창장을 받고 있는 아버지

 

 

 

  ^^ 2012년도 선정 병역명문가 중 표창을 받은 20가문 대표가 김황식 국무총리, 국방부 차관, 병무청장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병무청에서 마련한 기념 액자 앞에서 부모님과 우리 내외.

 

 

 

  ^^ 가족석에서 시상식을 지켜 보는 형과 형수, 동생과 어머니, 숙부.

 

 

 

  ^^ 큰아들과 아내.

 

 

 

  ^^ 병무청 청춘예찬 블로그 기자가 우리 가족석에서 취재하는 모습. 

 

 

 

 

 

 

 

 

 

  ^^ 모병병사들이 국무총리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모병병사들은 군 입대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질병치료와 영주권 취득 후 자진 입대한 병사들이다.

 

 

 

  ^^ 군복무중인 가수 비(정재훈)가 사회를 보고 있다.

 

 

  

2012년 대한민국 병역명문가 <이규민 가족> 병역 이행 소개

 

1. 1대 - 이규민 (해병대 상병, 1956. 4 ~ 1959. 1. 34개월 근무) 

 

 

     시 끼니를 잊지 못할 정도로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모님의 연세가 많아 장남인 나는 19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1955년 9월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내 나이가 24세였다. 그동안 자식은 남매를 둔 상태였고 셋째를 잉태한 상태였다. 또한 아래로 혼인하지 않은 동생 2남 1녀도 내 몫으로 남겨진 상태였다. 아버지는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으나 땅 한 평도 없는 상태였다. 대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1956년 4월에 영장이 나와 입대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7개월만이었다. 자식과 동생들 어머니와 아내가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해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서부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6.25 전쟁이 휴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 했고 전쟁의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날 화목작업을 위해 임진강 야산으로 오르다가 6.25때 설치해 놓았던 대인 지뢰의 선이 발목에 걸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죽을 고비도 넘겼다.

  산속 벙커의 내무생활은 춥고 배고픈 나날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근무를 마치고 벙커로 돌아오니 술에 만취한 소대장이 부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침상에 한 줄로 불러 앉혀 놓고 횡설수설 하던 중 위협하기 위해 권총을 대원들에게 겨누었다. 소대장은 권총에 실탄이 장전된 줄도 모르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바로 옆에 있던 대원이 총알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내가 고개를 조금만 더 숙였더라면 그 총알은 나에게 꽂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죽은 부대원을 담요에 싸서 산 밑으로 옮기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 것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집이 걱정이 되어 군 생활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2. 2대 - 이상호 (해군 병장, 1975. 3 ~ 1978. 2. 36개월 근무)

  

 

     1974년 겨울, 나는 대학 2학년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입대를 계획하고 있던 중에 한 신문에서 우연히 해군병 모집 광고를 보았다. 그간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터라 호기심이 발동하여 입대 지원서를 내고, 얼마 뒤에 동작구의 한 공고에서 시험을 보았다. 시험 문제는 지능 테스트 같은 것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워낙 지원자가 많아 떨어질까 약간 겁을 먹기도 했다.

  다시 얼마 뒤, 운인지 실력인지는 모르지만 걱정과는 달리 입대통지서를 받았다. 1975년 3월 3일, 진해훈련소에 입소하였다. 힘겨운 8주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4월 말쯤 나는 제5해역사령부로 발령을 받았고, 여기서 다시 소청도에 있는 한 전탐기지로 2차 발령을 받았다. 갑판수병으로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동기 2명과 함께 여객선 ‘옹진호’를 타고 부임하였다. 낯선 섬, 게다가 북한이 시야에 빤히 바라보이는 곳인지라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곳은 섬에다 신설기지이어서 힘겨운 일이 더 많았다. 전탐기지이어서 3교대로 벙커 근무를 해야 하는데 저녁이나 밤 근무를 하면 낮에 많은 작업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중에도 벙커 둘레에 방공호를 파는 일과 기름 드럼통을 옮기는 일은 무척 힘이 들었다. 특히 기름통을 나르는 일이 그랬다. 24시간 운전하는 발전기에 사용할 경유 드럼통을 바닷가에서 숙소와 발전소가 있는 산 중턱가지 손으로 밀어 올리는 일을 1주일가량 하고 나면 우리는 거의 녹초가 되곤 하였다. 그 일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어서 육지로 발령이 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또 한 가지 잊히지 않는 것은 화장실 청소였다. 그 부대는 중대 정도 되었는데 재래식 화장실이어서 한 번씩 화장실 푸는 작업을 하면 2-3일 걸렸다. 그 작업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무척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소청도라는 작은 섬에서 근무한 약 1년 동안 참으로 많은 경험을 하였다. 입대하기 전 학기 중에는 거의 연일 벌어지는 데모로 학교가 조용할 날이 없던 시절, 어차피 공부도 제대로 못할 바에는 병역이나 해결하자는 생각에서 자원입대한 해군, 배를 타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육상 근무를 명받아서 간 소청도는 여린 나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힘겨운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거의 주기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북한의 경비정들을 레이더로 포착하여 그 동향을 보고하고, 또 가끔씩 해안포를 쏘아댈 때 전투배치를 하는 과정 등을 통해 북한이 어떤 곳인가 내 눈으로 직접 실감한 경험들은 책으로만 읽었던 북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들이 지금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수시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것은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항상 현재처럼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언제쯤 말끔히 사라지고 함께 웃으며 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언젠가 오기는 오겠지만, 그 날이 아직 요원한 것처럼 생각되어 더욱 그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되는지도 모르겠다.

 

 

 3. 2대 - 이무현 (육군 병장, 1978. 5 ~ 1981. 1. 33개월 근무) 

 

 

     1977년 공군병에 지원하여 합격과 함께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아 기뻤다. 그러나 대전 유성에 있는 교육대에 입대한 뒤 그곳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이상소견으로 귀가 초치되었다. 군대에 간다며 송별식을 해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민망하였으나 곧 육군에서 영장이 나와 입대하게 되었다.

  제2훈련소에서 수도방위사(당시 수도경비사)에 차출되어 훈련을 받았으나 반신반의 했다. 수방사 배치는 훈련점수도 좋아야 하지만, 신분 조회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수방사에 차출되어 자대에 배치되기 전 보충교육대에서 받은 혹독한 훈련은 인내의 한계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수방사 출신으로 ‘근위병’과 수도 서울의 ‘방패’로써 근무한 것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이어진 12.12사태를 병영에서 겪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수방사의 임무가 대통령경호경비가 그 첫째인데 그 대상이 유고된 상태에서 혼란과 위기감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통령 유고시에는 군장을 꾸려 놓고 전투화를 신은채로 취침하기도 했으며, 12.12사태 때에는 같은 사령부 내에서 서로 반목하며 총부리를 겨누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기도 했다.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국난극복’의 현장에 있었던 군인이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굴곡이 있을 때마다 군 생활에서 얻은 인내와 지혜가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4. 2대 - 이주현 (해병대 병장, 1978. 12 ~ 1981. 6 / 31개월 근무)

  

 

     는 아버지가 해병대에 근무할 당시에 잉태되었다. 해병대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내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다. 어릴 때 농촌에 살았는데 대부분 초가집인 마을에 불이 자주 났다. 그때마다 ‘불이야!’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젤 먼저 아버지가 불이 붙은 지붕에 올라 가 계셨고, 초등학교 다닐 때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이면 불어난 냇물과 개울을 건널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가장 먼저 달려 나오신 분이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가 해병대를 나오셨다는 걸 알았고 커서 해병대에 지원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전선 백령도에서 근무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 기름등(난포등)으로 생활했다. 백령도는 해무가 자주 발행하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벽한 전투준비를 위해 포와 개인화기가 녹슬지 않게 닦는 게 일과 중의 일과였다. 쉴 틈 없는 긴장된 병영생활이었다. 또한 물이 귀한 탓에 세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늘 손에는 때가 꼬질꼬질했다. 전역하기 전 부대에 우물을 파서 후임들에게 빨래터를 만들어 준 게 기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역 후에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마음으로 지금은 해병대 서울시 강동구전우회에서 수석부회장직을 맡아 지역봉사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그동안 행정자치부 장관상을 받는 등 12회의 표창을 받기도 했으며, 사회 봉사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노력하고 있다.

 

 

5. 3대 - 이동헌 (육군 병장, 2002. 4 ~ 2004. 6 / 27개월 근무)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이등병 시절을 보냈다.

  강원도 화천의 보충대에 입대하여 힘든 훈련을 마지고 유선병이라는 보직으로 군 생활을 했다. 훈련 때마다 ‘방자통’을 매는 일은 정말 지옥과 같은 일이었다.

힘든 훈련도 훈련이지만 여름에는 잡초, 겨울에는 눈과의 싸움도 많이 생각난다.

  2년이란 군 생활이 나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세월이지만, 그 시간이 인생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 행복이라는 값진 마중물이 될 것이다.

 

 

6. 3대 - 이준영 (육군 병장, 2003. 3 ~ 2005. 4 / 26개월 근무) 

 

 

     등병 때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탈진 직전까지 뛰고 또 뛰었던 첫 훈련,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선임들의 뒤를 따라 가기에 급급했다. 

  일병 때 처음으로 포병 실제사격을 경험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에 정말 놀랐다. 엄청난 화력을 경험한 병사들은 곡사포의 무시무시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선임이 된 뒤 처음으로 훈련을 나가 분대장을 달고 당직사관을 섰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늘 지시를 받던 위치에서 지시를 하는 위치에 있으니 부담과 긴장은 말할 수 없었다. 훈련 중 거대한 포가 앞으로 고꾸라져 땅에 처박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러나 전 대원이 합심하여 원상 복구하였을 때의 희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혹한기 훈련은 영하 28도의 살인 추위 속에서 24시간 잠도 자지 않고 강행되었다. 인내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잠이 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들면 죽는다며 서로 다그치며 악몽 같은 밤을 새웠던 전우애는 뜨거웠다.

 

 

7. 3대 - 이광년 (육군 병장, 2006. 12 ~ 2008. 11 / 24개월 근무)

  

 

     3사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했다. 상병을 달고도 생활관에 후임이 들어오지 않아 막내 같은 생활이 계속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사관후보생을 가르치는 조교 생활은 힘들고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 명 한 명 일일이 평가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줘야 하는 조교로서 우선 자신부터 절대 틀리면 안 되기 때문에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엄격한 자기 관리가 요구되었다. 시범 액션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를 악물어 이빨이 다 깨어질 정도였으며, 교육생 앞에서 힘든 내색도 못하고, 물조차도 생도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마셔야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교육은 부대가 이동하는 중에 거듭되는 게릴라성 공격과 진지 구축 등을 하는 과정이 있는데, 조교는 사전에 아군, 적군으로 나뉘어 엄청난 연습을 해야 했다. 훈련 시 연막탄을 뒤집어쓰고 힘들어 하는 조교와 사관생도들의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교육이 없는 날은 생도들을 가르칠 시나리오를 외워야 했고, 중대 예초병에 지원하여 부대 내 제초작업과 대민 요양병원 봉사활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병역의무를 조교로 근무한 것이 행운이었고 큰 경험이었다. 많은 교육생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가르쳤던 힘든 경험들은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에 소극적이던 성격이 자연스럽게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사회에 진출하여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8. 3대 - 이영상 (해병대 병장, 2007. 3 ~ 2009. 2 / 24개월 근무)

  

 

     버지가 해병대 다녀온 것이 자랑스러웠다. 또한 해병대 제복을 입고 지역사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더욱이 할아버지께서 해병대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굳혔다. 이왕에 가는 군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멋진 해병이 되고 싶어 지원하게 되었다.

  군 생활 중 통신반장으로 있을 때 연대 주특기(통신) 경연대회에서 1등을 목표로 후임 병들과 밤잠도 반납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결과 기어이 1등을 차지했는데, 자대에 돌아오니 우리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포상으로 받은 행복했던 휴가가 생각난다.

  지금 대학 졸업반으로 취업의 문이 좁아 걱정이다. 그러나 군대 경연대회 때처럼 노력하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임한다면 사회의 어려운 관문도 잘 통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2.  6.  15.  세종문화회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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