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의 작품을 찍음>
그랬다. 한 달 전 큰오색딱따구리가 신혼집을 꾸리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노랑부리를 치켜든 새끼에게 먹이
를 물어다 주는 사진을 찍겠노라고.한데 짝을 맞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도 농사도 벌써 끝난 건지! 마른
나무에 구멍만 휑하니 뚫려 있고 주위엔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큰 기대는 없이 갔지만 그래도 허탈한 마음이다.산
에 들었으니 들꽃을 보고 가는 것은 당연지사. 감기증세로 약을 먹은 반쪽은 오늘따라 파리약 먹은 파리처럼 비실거
린다.오늘은 그만 내려가자고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산을 넘는다.굳은 표정, 저기압이 밀려온다. 나무에 잎
이 돋아 우거져 하늘을 덮고 낮은 자리엔 들꽃도 뜸하다. 쉬엄쉬엄 살피며 가는 길 반쪽은 자꾸만 뒤쳐지고. 이런
때 들꽃이라도 있다면 잠시 엎어진 사이에 쉬기라도 하겠지만 꽃이 없다.간혹 보이는 것은 천남성뿐.이렇게 무리
해서 산을 넘는 이유는 봄에 봐 놓은 감자난초를 볼 요량인데 자생지엔 흔적도 없다. 며칠 전 자생지 파괴 소식에 설
마 했었는데 한포기의 꽃도 잎도 보이지 않고 무수한 발자국뿐이다. 정말 어이가 없다. 옮겨간 꽃들은 얼마나 인간
의 틈새에서 버텨낼 것인가.결국 자생지만 빈터로 남을 것이다.허방하다. 오늘은 줄곧 우울한 날이다.파란 하늘
과 노랑 빛 가득한 연록의 눈부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더욱이 네 시간 반의 산행 내내 반쪽과의 거리는 저만치
멀었다.무슨 묵언 수행자도 아니고 땅만 보고 묵묵부답이다.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물건처럼 둘의 간격은 종일
좁혀지지 않았다.봄날은 가는가? 결국 하산하여 1200원짜리 '싸만코' 아이스크림 하나에 얼었던 마음이 눈 녹듯이
풀어졌다.어지러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그랬다. <2009.05.10. 천성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