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雜記

집안 시제(時祭)를 다녀와서

실암 2010. 11. 19. 11:01

10월이면 일가친척 씨족이 모여 합동으로 묘지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희 고향에서도 지난 10월 14일 시제를 모셨습니다.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집에서 지내는 기제사(忌祭祀)와 묘소에서 지내는 시제가 있습니다.

기제사는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 해서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까지가 일반적입니다. 고조부모까지는 살아생전에 만날 수 있는 분들이라 집에서 제사를 모신다고 합니다.

시제는 집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는 5대 이상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지내는 제사로 묘사, 향사이라고도 하는데 저희 고향에선 시사(時祀)라고 합니다.

해마다 10월 상달에 햇곡식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함도 있겠지만 조상의 묘를 잃어버리지 않고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는 것도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시사등>에서 바라본 고향 마을, 뒤로 보이는 산이 대가산(大佳山)으로 해발 350m인데 산줄기에 조상 산소가 많이 있습니다.

    

 

숭조사상과 전통문화 풍습이라는 큰 뜻도 있겠지만 요즘은 경향각지로 흩어져 사는 일가가 일년에 한번씩 모여 서로 핏줄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정말 먹을거리가 없었습니다. 떡 한 조각 얻어먹기 위해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시제를 지내는 산으로 달려가기도 했었습니다.

마을에서 시오리 떨어진 산 속에 있는 묘소에 제사를 지낼 때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는데 산짐승이 울어 겁이 나서 덜덜 떨기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음식을 머리에 이고, 지개에 지고 묘소로 향하는 부모님을 따라 나서는 길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최근까지도 저희 고향에선 부모, 조부모 등 기제사를 지내는 조상님까지 시사를 함께 모시는 풍습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집마다 제사 음식을 차리느라 분주하고 자손들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고향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최근 들어 시제의 의미처럼 고조부모까지는 시사를 없앴습니다. 그러다 보니 참여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어르신들은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상차림도 기제사처럼 온갖 음식을 다 차렸었지만 지금은 아주 간소하게 차리고 있습니다.

 

 

    ** 시제를 지내기 전에 먼저 산신제를 올립니다. 제관은 일반적으로 고향분이 아닌 출향인이 맡고 시제 음식을 마련한 유사도 함께 합니다.

        축문을 하는 분은 마을 이장이십니다.

 

 

 

    ** 문열공파 15세손인 起字 馨字(기형), 저의 11대조 할아버지로부터 시제가 시작 됩니다.

        이 산소는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져 있고 아침일찍 시제을 모시기 때문에 참여 인원이 적습니다. 

 

 

 

 

 

 

    ** 위 사진의 기자 형자 할아버지와 내외간인 할머니의 산소입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내외분의 산소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 할머니 산소는 마을과 붙어 있기도 하지만 이때부터 많은 자손이 참여합니다. 

 

 

 

    ** 헌작은 항상 종손이 먼저입니다. 모든 제사의 중심은 종손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제사에서 제관이 술잔을 올리는 것을 헌작(獻酌)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올리는 것을 초헌(初獻) 두 번째는 아헌(亞獻), 세 번째는 종헌(終獻이라고 합니다.

초헌은 종손이 올리고, 아헌과 종헌은 멀리서 온 자손이나 문중에서 특별한 자손이 올립니다.

 

 

 

    ** 축문을 고합니다.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지봉상사 상향"  오늘 연례행사로 자손들이 모여 맑은 술과 철에 나는 음식을 올리니 흠향하시라는 내용입니다. 

 

 

 

 

제 고향 마을은 성주(星州)이씨 집성촌으로 100여 가구가 일가를 이루고 사는 큰 마을입니다. 이웃하는 두 마을도 같은 성씨인 성주이씨 문열공파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늘어나다 보니 직계파가 나뉘고 큰 대소가(大小家), 작은 대소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시제는 온 동네가 다 모여서 지내고 그 다음 작은 시제, 그리고 다시 그 아래 시제로 갈라지는데, 자손들도 먼 일가에서 차츰 촌수를 따질 수 있는 가까운 대소가로 줄어들어 5대조 할아버지의 제사를 끝으로 시제가 끝이 납니다.


 

 

 

 

성주이씨 문열공파는 兆字 年字(이조년)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입니다.

저는 문열공파 25세손입니다.

이조년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長字 庚字(이장경) 할아버지는 百年(밀직사사), 千年(참지정사), 萬年(낭장), 億年(참찬), 兆年(정당문학) 등 다섯 형제를 두었습니다.

문열공 이조년 할아버지는 시문에 능하셔서 우리가 익히 아는 시조를 남기셨습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三更(삼경)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1268-1343) 고려말의 학자, 시와 문장에 뛰어남>

 

또한 이억년과 이조년 할아버지 형제의 <투금탄> 전설도 함께 소개합니다.

이억년이 개성유수(당시 수도 총괄책임자, 요즘의 서울시장 격)의 벼슬을 버리고 경남 함양으로 낙향 할 때 그의 동생 이조년은 한강 나루를 건너 배웅하기

위해 같이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도중에 금덩어리 두개를 주워서 두 형제가 한 개씩 나누어 가졌다.

양천강(현재 김포) 나루터인 양화도(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 내)에서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강 중간에 이르렀을 때 아우인 이조년이

나눠가진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 이억년이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평소 형님을 깊이 공경해 왔는데 금덩어리를 나누어 가진

순간부터 홀연히 시기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이는 황금이라는 착하지 못한 물건 때문이라 여겨져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에 형 이억년이 ”너의 마음이 참이로구나, 나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도다.“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 일화는 <고려사 절요>, <고려사 열전>, <양천 읍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 그 연대는 고려 충렬왕 20년(1294년)경이며 그 이후 이 나루터가 있는 강을 ‘투금강’ 또는 ‘투금탄(탄 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내에 당시의 나루터를 나타내는 표지와 함께 공원안내문에 고려 중,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간의 고사’라고 전설을 밝히고 있습니다.

 

 

 

    ** 저로 부터 11, 10, 9, 8대조까지는 이날 모인 모든 자손들이 함께 제사를 모시고,  7대조 부터 대소가가 갈라져 제사를 모십니다.

 

 

 

    ** 산소 주변이 토성으로 이뤄져 있는데 지금은 많이 흐물어지고 낮아 져서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었지만 선산을 지키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습니다.  

 

 

 

 

 

 

저희 마을로 들어가자면 나지막한 토성을 넘게 되는데 토성 아래에 조상을 모신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시사등’이라 부르는데 토성을 따라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항상 조상의 산소를 먼저 바라보게 됩니다.

이 넓은 터의 묘지는 어릴 때 운동장 구실도 톡톡히 했습니다. 축구장이 되기도 하고, 야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봉분과 봉분사이는 축구골대가 되기도 하고, 야구장의 베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 팬티바람으로 봉분 위에서 미끄러지며 슬라이딩을 하기도 하고, 달이 밝으면 밤에도 축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무수한 봉분 덕분에 축구공이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달아나서 그에 따라 아이들은 조상의 봉분 위로 나뒹굴기 일쑤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의 상투를 잡고 배 위에서 장난을 치듯 우리도 공동묘지란 걸 잊고 천진난만하게 놀았는데 선조께서도 까마득한 후손들의 재롱으로 봐 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상의 봉분이 상한다며 어르신들께 혼쭐이 나기도 많이 했습니다.


 

 

 

 

 

 

    ** 중앙에 웃고 계신분이 저희 아버지입니다.

 

 

조상의 묘소 앞에서 오늘을 반추해 봅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움을 표시하고 마음으로 조상님께 고합니다. “어려운 가운데 큰 아들이 작은 회사에 취직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을 했노라고, 그리고 경제난으로 힘든 회사에서 퇴출되지 않고 아직 건재하다고... 다 조상님 은덕입니다.” 라고. 조상님께서도 기쁜 일 슬픈 일 늘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르신들은 오늘의 세태에 걱정이 한결같습니다.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조상을 기리는 제사와 시제도 머잖은 시기에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올해는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유교문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시제는 조상의 뿌리를 확인하는 모든 제사의 으뜸이 되는 만큼 먼 훗날까지 오롯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 제사를 마치면 차렸던 모든 음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참석한 인원 수대로 <봉승>을 놓습니다. 떡과 고기, 심지어 대추 한알까지 골고루 나눕니다.

       시제 음식은 어른도 한 몫, 아이도 한 몫을 나눠 가지는데 조상께 올렸던 음식이니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이겠지요.  

 

 

 

 

 

    ** 음복(飮福)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 따로 잔치국수를 말아서 대접을 합니다.

 

 

 

    ** 모과나무에 모과가 많이 열렸습니다. 어릴때는 익기도 전에 흔들어 따가서 모과가 익을 때 쯤이면 몇개 남지도 않았는데 고스란히 다 익어서 많이도 달렸습니다.

 

 

※ 世와 代 = 世는 始祖를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가며 (父子相續繼爲-世), 代는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로 하여 위로 올라가며 (父子相對赤-代)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의 조상을 몇 대조(代祖) 할아버지라 하고, 자신은 시조 또는 어느 조상으로부터 몇 세손(世孫)이라고 합니다.


 

 

2010.  11.  14.  경북 상주군 이안면 고향마을에서